[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형미 시인 - 주영국 시집 '새점을 치는 저녁'
발자국이든 무엇이든 ‘찍으며’ 한 생을
삼복(三伏) 떠나고, 입추(立秋) 너머 처서(處暑)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지독한 더위 속에 백일홍이 붉다. 삼복 기간 동안 저 꽃이 세 번 피고 지면 벼 모가지가 나온다 하였던가.
주영국 시인의 시집 <새점을 치는 저녁>(푸른사상, 2020)을 읽고 나서 생각했다. 자고로 ‘꽃이 핀다는 것’은 그런 일 아닐까. 더워서 숨이 턱턱 막히는 그 순간, ‘살고 싶던 간절한 마음’을 ‘세상에 붉게 터뜨리는’일 아닐까 하고. 그렇게 터뜨리고 나면 거짓말같이 ‘청죽의 마디 같은 칸칸의 희망’이 오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 선선한 초가을 볕 속에서 벼 모가지가 나오는 거라고.
“혁명도 결국은 살자고 하는 것’이므로, 단 하나 희망을 위해 시인은‘낫을 갈아 날을 세운 청죽(靑竹)의 창을 들고 / 자주 세상, 평등 세상’을 외쳤을지도 모른다. 생의 뒤쪽에 무슨 통증이 있었는지 유랑지의 쓸쓸함도, 욱신거리는 뼈아픔도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살아낸 몫의 생.”
하여 시인은 자주 생의 어디에든 발자국을 찍었을까. 그야 ‘무너진 집터에서 찾아낸 아버지의 인감도장’ 같은 것일 테지만, ‘돌아보지 못하고 멈추는 날’이 비로소 ‘찍는 일 끝내는 날’이기에 그는 최선을 다해 이 악다물고 발자국을 찍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새처럼 날 수 있다는, 그런 봄날의 꿈을 꾸는 사람이므로.
물론 그에게 있어 희망은 ‘빚 보증 잘못 섰다 날아간/ 길가의 큰 밭’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밭을 주고 간 아버지의 검은 색 뿔도장 같은 것, 또는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목숨일 수도 있다.
“이전의 생에서 너는 무엇이었든 /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라”(‘돌아오지 마라’ 중)
하지만 그는 남도의 사내다. ‘진안 신안의 섬 어의도에서 태어나 육지의 이 곳 저 곳을’ 산 이력을 지닌 사람. 제13회 전태일문학상과 제19회 오월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강인한 뼈마디와 뜨거운 숨을 지니고 있는 시인. 즉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희망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며 만들어진 남도의 오월 정신쯤은 기본으로 갖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하지만, 체 게바라가 붙잡힐 때 소총보다 더 힘껏 쥐고 있었다는 삶은 달걀 두 개로 말미암아 삶을 달걀을 먹을 때마다 체 게바라 생각에 목이 메기도 하는, 그런 류의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가난과, 슬픔과, 그리움에 찌들어야 하는 아픈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어루만질 줄도 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가는 그 필사의 시간을 염려하고, 되레 따뜻하게 감싸 안기도 한다. 그렇게 산 생들을 버리는 것보다 껴안아 버리는 일이 차라리 쉬웠을 것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그는 ‘꽃불철공소’ 하나 눈 속에 넣고 있는 것마냥 강렬하며 뜨겁다. ‘모욕은 견딜 수 있어도 / 배고픔은 끝내 참기 힘든 // 생존의 밥’따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자신이 생존을 염원하는 민중이므로, 통증에 시달리고 공터에 버려진 채 추억을 되씹는 허방세상을 안쓰러이 여길 수도 있는 것.
한마디로 주영국 시인은 ‘대지에 봄비 스미는 옹골진 모양새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사각 진 얼굴에 다부진 눈동자가 다가와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살아 있었느냐, 살아 있었느냐 흔들어 묻는 듯하다. 마치 그 말을 묻기 위해 기꺼이 윤회를 해서 돌아든 바람처럼 말이다.
백일홍의‘더운 비밀’을 첫시집 『새점을 치는 저녁』 안에 몽땅 쏟아낸 주영국 시인의 시편들. 그렇다. 그는 삼복을 건너온 저 붉디붉은 꽃의 힘으로, 끝내 너른 논 벼 모가지를 다 꺼내놓고야 말 심산이다. 그것이 바로 남도 사내, 아니 남도 시인의 뚝심인 것이다.
누군가의 시집을 읽을 때 밑줄 그을 곳이 많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밑줄이 그어지는 곳에서 나와 ‘그’가 ‘만난다’고 여겨져서다. 그러고 a보면 상행선 무궁화호에서, 삶은 달걀과 새점을 치는 저녁, 영광 불갑사와 봄바람 봄 나무속에서 우리는 숱하게 만났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만남이 서로가 은밀히 교환하는 눈빛 같은 거라는 것을 안다.
시집 속에 그어놓은 밑줄 수만큼, 이 여름 가기 전 시인과 목포 뒷개 어디쯤에 여장을 풀고 새우깡에 낮술 한 잔 하고 싶다. 그 때도 우리는 맹목적으로 희망적일 것이므로.
올 여름은 거 참, 시인의 ‘이름 석 자 생피처럼 붉다.’
전북일보,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형미 시인 - 주영국 시집 '새점을 치는 저녁'", 20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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