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미의 다시 만난 세계] 분노의 감옥에 갇혀버린 여성운동
필자는 올해 초 디지털 성폭력 고발단체의 젊은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순발력 있게 문제에 대처하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겪는 분노로 상처받고 있었다. 필자는 힘에 겨워 황폐해지고 있는 그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체는 휘청거렸고 운동가들을 고통스러워했다.
그들만 겪는 일이 아니다. “나는 여성학과 결혼했다고 느낄 만큼 그것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였다… 언제부터인가 나와 여성주의 사이에 어떤 틈이 생겨나고 있음을 느꼈다” 고미송은 그의 책 『그대가 보는 적은 그대 자신에 불과하다』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것은 여성학에서 벗어난 한 개인의 간증 책이 아니다. 여성학을 하며 겪었던 ‘분노’의 문제를 치열하게 다룬 여성학박사 논문을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고미송은 여성학을 하면서 세상의 불평등과 폭력에 대한 분노라는 부정적 에너지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와 고통을 줬다고 언급하고 있다. 정의로운 분노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분노는 없는 것 같다. 결국 많은 여성은 여성해방을 주장하면서 분노의 감옥에 갇혀버리게 된 것이다. 그는 ‘분노가 자원이 된 여성운동이 적절한 해방운동이 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흑인 여성들이 백인 페미니스트들에게 ‘당신들만을 위한 페미니즘에 우리를 이용하지 말라’고 비판하자 페미니즘은 즉각적으로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subaltern·하위주체)은 말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을 때 페미니즘은 지독한 억압 속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많은 여성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고심했다. 고미송의 문제 제기는 여성주의 안에 어떤 파급을 일으킨 것일까? 분노가 아닌 무엇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역동시킬 것일까?
고미송은 분노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관해 우선 꼼꼼하게 살핀다. 분노는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발견했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인 반응이다. 실수로 의자 모서리에 부딪혀 아플 때 그것을 가지고 분노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사람이 고의로 밀쳐 넘어졌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분노한다. 고통을 야기한 실체가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의 원인을 ‘가부장제’라는 외부에서 찾았고 그것에 분노해왔다.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는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의 원인이 발견되는 한 분노는 지속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고미송은 분노를 없애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는 분노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인 ‘원인과 결과’라는 설명체계를 비판한다. 원인과 결과는 근대주의 기계론적 인식론에서 가장 신뢰받은 인식론이며 여전히 많은 사람은 그러한 사고방식에 침윤돼 있다. 고미송은 원인과 결과라는 생각방식은 종종 허구이며,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 권력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LA 흑인 폭동 때에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빈곤의 원인으로 지목된 집단은 억척같이 일하며 부를 축적했던 한국인 이민자들이었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인종차별 사회가 만들어낸 허구였다. 흑인들을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한 원인으로 지목된 한인들에게 폭력적으로 분노했다. 한인들은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것을 여성주의와 직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원인과 결과들은 이렇게 구성된 것이기도 하다,
고미송은 여성주의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을 의미화하기 위해 그 원인을 밝혀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찾아낸 원인을 마치 확고한 실체처럼 여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원인이기도하고 원인이 아니기도 하다’ 즉,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라는 새로운 문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애매한 태도는 답답한 대답 같지만, 원인을 하나의 실체처럼 분명하게 정해놓고 분노로 질주하는 우리를 진정시키는 실질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외부에 있는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서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매번 실패한다. 다양한 원인들이 꼬리를 물고 등장하며 분노를 야기할 뿐이다. 고미송은 여성운동가들에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서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내려는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한다. 이건 얼핏 보면 여성주의를 그만두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런 단호한 표현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원인으로 찾아낸 것을 절대화 하지 않는 겸손한 성찰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종교적 수행과도 같은 것이라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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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신문] 최형미 여성학자 2017.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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