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아진 장편소설
어쩌면, 진심입니다
146×210×20 mm|320쪽|15,900원|979-11-308-1200-7 03810 | 2017.7.5
■ 도서 소개
한순간도 진심 아닌 적이 없었던 자가 벌이는
한판의 씨름 같은 인생
심아진 장편소설 『어쩌면, 진심입니다』가 <푸른사상 소설선 13>으로 출간되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 한 인물의 종잡을 수 없는 인생이 그의 ‘진심’과 ‘작가’가 벌이는 한판의 씨름으로 펼쳐진다. 독자 역시 ‘진심’ 또는 ‘진실’과의 숨가쁜 씨름을 하게 된다.
■ 도서 목차
■ 책머리에
서장
1부 매사에 진심인 자가 세상을 사랑한 방식
하필, 수상 무대입니다 / 마음과 내장이 뒤바뀌든 심장과 내장이 뒤바뀌든 / 주생전 / 집권여당 사무국장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 내가 너를 불렀노라, 너는 내 것이라 / 광대무변한 세상을 상대로 노는 무변광대한 방법
2부 무덤 언저리에서 포대기 언저리까지
무덤 언저리의 다르고 또 같은 이야기 / 이 결혼에 반대합니다만 / 나만을 사랑했다, 진심으로 / 전설이 되다 / 대결 / 진심으로 세상을 대하다
3부 진심이라는 너른 평원
어쩌면, 진심이 아닐 수 없었을 뿐이다 / 나는 그 일을 알지 못하였노라 / 출세 가도 / 대변을 찍어 먹고도 살아남아야 한다 / 개자식의 진심
4부 길
꿈길 / 꿈이 아닌 길 / 길이 가다 / 무너진 길 / 우회로 / 신의 길 / 남겨진 자의 길 / 막다른 길
■ 작품 해설:그러니, 진심 _ 전소영
■ 저자 소개
심아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21세기 문학』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에 『숨을 쉬다』 『그만, 뛰어내리다』 『여우』가 있고, 그 외에 『그 길, 나를 곁눈질하다』 『내 이야기 어떻게 쓸까?』 『나를 안다고 하지 마세요』 『거짓말 삽니다』 등을 펴냈다.
■ 출판사 리뷰
이희락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실은 용의주도한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교활하고, 때로는 배려심 넘치고 때로는 지독히 이기적이고, 그러면서 단 한순간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거짓말 보태서 15 대 1로 싸워 건달들을 제압했다는 전설적인 학창 시절이 있고, 집권여당의 도당 사무국장으로 잘나가던 화려한 한때가 있는가 하면, 빚에 허덕이면서 연수원을 꾸려가는 시절이 있다. 나만이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여러 명의 여자들이 있는 반면, 그 이름만으로도 치를 떠는 아내와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이 있다.
심아진 장편소설 『어쩌면, 진심입니다』는 이 독특한 주인공의 삶을 독특한 서사로 엮어간다. ‘작가’와 ‘이희락의 진심’이 벌이는 한판의 씨름, 그리고 참지 못해 끼어드는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 한바탕의 연극처럼, 마당놀이처럼 펼쳐진다. 이희락의 인생 역정은 과거와 현재를 마구 넘나들고,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제멋대로 바뀐다. 서로들 자기 주장을 역설하고 싶어서 마이크를 빼앗으려 덤비는 형국이다.
화두로 삼은 ‘진심’에 대해서도 그 서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생각이 나올 법한 소설이다. 맹목적인 사랑과 출구 없는 욕망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질 수 있는 소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과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이 다르고, 내가 진심이라 믿고 있는 바와 남이 파악하는 진상이 다르기에. 인간이 그렇게 모순적인 존재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 그렇게 불합리한 세상이기에.
■ 책머리에 중에서
성경에 나오는 유다에 대한 보르헤스의 파격적인 해석은 “그(예수)가 치른 희생을 한 오후에 겪은 십자가의 고통에 한정시키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된다.”는 문장으로 대변된다. 즉 보르헤스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완전히, 영원히 멸시를 받는 존재여야 한다면, 그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유다여야 한다고 본 것이다. 물론 소설이다. 그런데 나는 늘 이런 소설만이 재미있었다. 누구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어떤 관점, 혹은 드러난 사건의 전혀 다른 이면을 슬그머니 내비치곤 하는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내 삶은 지금보다 훨씬 초라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온기를 던져주었던 우직한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난 후, 어이없는 두 정권을 경험하면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지 않을 수 없었기에, 내가 이야기에 다가가는 속도보다 이야기가 내게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희락의 진심과 씨름하는 것이었다. 이희락은 내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누군가이고, 동시에 나 자신이다. 나는 인간에 대해, 인간의 영혼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흔히 우리가 진심이라 부르는 것이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광장에 나간 사람이든 나가지 않은 사람이든, 또 촛불을 들었든 태극기를 들었든 모두가 진심이라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사투의 시간이었다. 안다리, 바깥다리, 잡채기 등 온갖 기술을 동원해도 이희락의 진심과 나의 씨름은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기기 위해 누군가의 진심과 맞붙은 게 아니었다. 나는 결론이나 해답 등이 오히려 불필요한 부유물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심에는 진심 아닌 것이 반드시 내포되어 있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불완전함과 무능함을 갖고 있지 않다면 결코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희망은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어야 희망이라지 않는가! 사랑하는 모든 이유들을 열거할 수 있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지 않는가! ‘보고 싶다’는 말에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이미, 항상 들어 있지 않은가! 나는 진심과 진심 아닌 것의 간극 자체가 진심에 내재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어쩌면, 진심입니다』는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배꼽 빠지게 하는 우스운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하필, 인간의 진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기꺼이, 즐겁게, 씨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이따금씩 시선에 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데는 단어들이 있다. 그것이 지닌 깊이와 너비를 충분히 알면서도 어쩐지 지루하다거나 낯간지럽다 여기게 되는. 그럴 때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은 단어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기척과 마음의 기색일 것이다. 이를테면 ‘진심’ 같은 말이 돌출되어 쓰일 때 모종의 불편함이 느껴졌다면 차라리, 혹독한 거짓의 말들로 점철되어 도통 진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즈음의 세계나 그 안에서 피로를 견디다 허름해진 저마다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때의 ‘진심’은 기꺼이 세계와 마음의 애틋한 거울이 되어준다. 어렵고 단단한 그 단어를 간절하게 붙든 소설에 진입하려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진심입니다』의 일이 그와 같다.
거칠게 줄이자면 이 소설은 아버지 이희락의 진심과 사투하며 그 삶을 진실되게 쓰려는 아들의 글, ‘이희락전(傳)’이다. 서사의 진행이나 인물 간 갈등을 통해 주인공의 성격이 형성되는 일반적인 이야기와 다르게, 전 안에서는 이미 결정된 주인공(전의 대상)의 성격이 서사의 향방을 정해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이것은 ‘본격적 인간 탐구의 형식’이어서 전통적이지만 시공을 뛰어넘어 유효하다. 여기서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희락의 생애를 갈무리하기 위해 도입되었음은 물론이다. 덧붙여 아들인 작가에 의해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므로 일종의 메타소설적 성격 또한 지니고 있다. 이희락의 진심은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아들과 길항하며 아들의 집필을 돕거나 또 방해한다. 아버지의 진심과 아들이 공동 필자인 셈이다. 거듭 적자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진심’이라 했다. 이 단어는 작중에서 넉살 좋은 존재로 의인화되어 소설 속 작가에게, 때론 소설 밖 독자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소설이 이채로웠다면, 혹 생경했다면 이 ‘진심’의 형상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의심하고 물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이희락이라는 존재의 진심이다. 그는 겉과 속 사이에 속수무책의 간극을 지녔지만 여간해서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았다. 그런 채로 욕망 안에서 평생을 소모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꽤나 남발했고, 많은 이들을 아끼는 듯 보였으며, 그것이 그의 한때를 칭송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진 사랑은 실상 대부분 치장된 욕망이었다.
욕망도, 사랑도 쉬이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둘의 질감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가 있는데 다름 아닌 관계의 모습이다. 욕망 안에서 나와 당신은, 차라리 나와 내 것에 가깝다. 나는 당신을 본질 그대로 인정하려 들기보다 소유하고 싶어 한다. 욕망이 결핍에서 태어난 까닭이다. 나는 나의 부족을 채워주는 상대를 갈망하며 내가 바라는 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꺼이 소유물이 되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허나 어떤 결락을 충분히 메꿔줄 수 있는 존재란 없으니 욕망이란 얼마나 헛된가.
이희락의 삶은 이 욕망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맞물려 있다. 그는 비참한 방식으로 부모와 헤어졌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지상 과제 삼으며 외면과 내면을 달리 키웠다. 이 상실이 그를 지독한 욕망 쪽으로 밀어붙인다. 욕망의 반대급부에 놓인 사랑이 자기만족을 위해 상대를 훼손시키지 않음으로써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욕망은 계속 다른 욕망으로 대체된다. 이희락의 진심이 주장하는 사랑이 새, 물고기, 말에 대한 소유욕으로 자리를 바꿔 갈 뿐 끝내 정주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소설이 담아낸 것은, 분명 출구 없는 욕망에 유폐된 이희락의 고통스러운 생애사이다. 그러나 그저 그것을 갈무리하기 위해 작가가 공들여 지면을 채운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희락의 욕망이 사실 우리가 지닌―혹은 사랑으로 오해하고 있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수차례 강조한다. 섬뜩해 보이는 이희락의 생애가 사위의 존재들에게 무척 ‘보통의’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도 그 중 하나다.
작가의 진심은 이제 어디를 향해 형형한 눈빛을 보낼 것인가. 그의 다음 좌표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약간은 편파적인 마음으로 큰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것이다. 혹은 이렇게 믿기로 하자.
모든 가치가 낡아지고 흐려지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명제가 있다. 진심을 감당하려는 소설의 진심이 아름답지 않을 리 없다.
―전소영(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여기 모든 일에 진심이 아닐 수 없는, 삶의 한순간도 진심 아닌 적이 없던, 파란만장 요절복통 다재다능한 인물 ‘이희락(李熙躒)’이 있다. 육체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학술적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 행정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피가 펄펄 끓던 한 사나이의 변화무쌍한 전 생애가 있다. 질풍노도의 기마병처럼 작가는 원고지의 행렬 따위를 가볍게 뛰어넘고 사통팔달 열린 길을 종횡무진 내달리며 이희락의 가족사와 연애사와 흥망사를 묘파한다. 마치 온 방향으로 구멍이 뚫린 마술 램프에서 구불구불 피어오른 연기가 허공에 복잡한 무늬를 그려내듯 이야기는 기기묘묘하고 희희낙락하다. “이 모든 이야기가 대체 가능한가?” 이렇게 묻는 독자 앞에 심아진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포즈로 반문한다. “어째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 해이수(소설가)
이 소설을 펼치면 우리는 누군가의 ‘진심’과 마주쳐야 한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진심’을 알고자 하고, ‘진심’ 속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그러다 타인이 불쑥 진심을 내보인 순간, 방심하고 있던 우리는 얼마나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지는가. 타인의 ‘진심’이라는 것만큼 우리를 불편하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작가 심아진은 우리를 이희락이라는 인간의 ‘진심’ 앞으로 데려간다. 이희락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질주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욕망 속에서 소진시키는 인물이다. 작중화자인 작가는 한 치의 성찰도 없이 오직 ‘진심’만으로 삶을 주파하는 이 흥미로운 인물의 삶을 냉정하게 분석하고자 한다. 무엇이 진심인가, 진심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 소설은 이희락의 진심과 작가가 벌이는 한판의 씨름이자, 이 책의 독자와 작가 심아진이 벌이는 씨름이기도 하다. 자신의 순결함을 주장하는 ‘진심’이 승리할 것이냐 혹은 작가의 냉정한 시선이 승리할 것인가 .
― 이기성(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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