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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신간도서

김장수, <로열패밀리, 그들이 사는 세상>

by 푸른사상 2025. 2. 21.

 

분류-- 서양근대사

 

로열패밀리, 그들이 사는 세상

 

김장수 지음|교양선 22|145×210×15mm|232쪽

23,000원|ISBN 979-11-308-2222-8 03920 | 2025.2.21

 

 

■ 도서 소개

 

왕실의 영광과 권력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간 욕망의 역사

 

김장수 교수(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의 『로열패밀리, 그들이 사는 세상』이 푸른사상 교양선 22로 출간되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지배한 호엔촐레른과 합스부르크, 왕실의 영광과 권력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간 그들 욕망의 역사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 저자 소개

 

김장수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석사 및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Die politische Tätigkeit F. Palackýs(팔라츠키의 정치활동)』 『Korea und der ‘Westen’ von 1860 bis 1900(1860년부터 1900년까지의 조선과 서방 세계)』 『Die Beziehungen Koreas zu den europäischen Großmächten,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r Beziehungen zum Deutschen Reich(한국과 유럽 강대국들과의 관계, 특히 독일 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정치활동』 『독일의 대학생 활동 및 그 영향』 『서양의 제 혁명』 『비스마르크』 『중유럽 민족문제』(공저)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주제별로 들여다본 체코의 역사』 『주제별로 살펴본 서양 근대사』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슬라브 정치가들이 제시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 방안』 『후스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격동기(1412~1648)』 『19세기 독일 통합과 제국의 탄생』 『메테르니히』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독일 통합의 비전을 제시한 프리드리히 2세』 『1848 독일혁명』 등이 있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와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문제를 다룬 많은 논문도 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세계문화사학회(구한국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목차

 

■ 책머리에

 

유럽을 양분한 최고의 가문, 그 흥망성쇠의 역사

1.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

2.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아들을 낳아야 한다

1. 세 번 결혼한 레오폴트 1세와 상호계승약관

2. 여성 상속순위까지 확정한 국사조칙

 

혈육인가 정적인가

1. 탈출하는 왕자들

2. 사상 최악의 부자지간

3. 여왕의 아들로 산다는 것

4. 비운의 황태자

 

왕가의 결혼은 다르다

1. 베를린의 쇼윈도 부부

2. 공주의 첫사랑

3. 전통에 희생된 황후

 

동성애 스캔들

1. 프리드리히 2세와 프레데르스도르프

2. 프리드리히 2세와 알가로티

3. 이사벨라와 마리아 크리스티네

 

근친혼의 비극

1. 선천성 유전병이 있는 페르디난트

2. 조피 프리데리케의 야심

 

더 화려하게, 더 장엄하게

1. 우아한 상수시 궁전

2. 영광의 상징, 쇤브룬 궁전

 

독특한 출산과 장례 의식

1. 출산 과정의 공개

2. 시신의 일부라도 영원히

 

■ 마무리하며

■ 참고문헌

 

 

■ 책머리에 중에서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이 탄생하기 이전 독일권에서 주도권을 행사한 국가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였다.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렸다. 이 두 가문이 1918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호엔촐레른과 합스부르크, 이 두 가문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공통점은 후계자, 즉 아들을 얻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문만 그랬던 건 아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독일제국 탄생에 혁혁한 공을 세운 비스마르크는 1848년 8월 21일 장녀 마리에가 태어나자 장인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아들이었다면 신께 무릎을 꿇어 감사했을 것이라는 사족을 붙였다. 호엔촐레른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아들 집착이 심각했던 것은, 남자 상속인 없이 사망하면 왕위 계승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계자를 얻으려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진 근친혼도 부작용을 야기했다. 대다수 합스부르크 가문 위정자에게서 얼굴 기형, 말단 비대증, 선천적 매독 증세 등이 확인되고 수명도 짧았다. 후계자에게 근친혼에서 비롯된 유전병이 있어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장자상속 제도를 무조건 고집했다. 1835년 오스트리아 황제로 등극한 페르디난트 2세가 그 대표적인 일례라 하겠다. 호엔촐레른 가문에서도 근친혼이 잦았지만, 얼굴 기형 같은 유전병은 확인되지 않았다. (중략)

이 책에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정치외교적 활동보다는 양국을 통치한 호엔촐레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확인되는 흥미로운 특징이나 전통을 특정 사례를 통해 확인하도록 한다.

 

 

■ 출판사 리뷰

 

독일 제국의 탄생 이전, 호엔촐레른의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는 독일권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해왔다. 비슷한 시기 두 가문에서는 국가적 위상을 크게 증대시킨 위대한 군주도 등장하는데,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유럽사 속 왕실의 영광과 권력을 이어가기 위해 두 가문이 추구한 욕망의 역사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저자는 유럽을 지배해온 두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해 각 가문의 흥미로운 특징이나 왕실의 전통을 확인하고자 했다. 왕조나 국가의 정치 외교적 활동보다는 왕실의 특이한 가족사를 중점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유년 시절부터 부친과 심각한 갈등을 겪은 후,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 친우가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정략결혼 상대로 어린 시절 낙점되었던 프란츠 1세는 그녀의 남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영토를 양보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여왕의 부군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니 손해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며느리 이사벨라는 남편보다 시누이를 더 사랑했다는 것이 사후에 밝혀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유럽사 뒤편에 숨겨진 흥미로운 사연들과 그 흔적을 따라가는 것은 서양사가 낯설고 어색한 독자들에게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 책 속으로

 

카를 6세는 남자 후계자가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국사조칙을 발표했지만, 이를 통해 왕국의 통합을 굳건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을 바로 공포하지 않고 당분간 비밀로 남겨두었다. 이는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카를 6세는 당시 유럽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후계자가 군대를 이끌고 전선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국사조칙으로 그의 장녀가 오스트리아 왕위를 계승하면 그런 일이 불가능할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결혼하고부터 가능한 한 빨리 아들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주치의들이 여기에 동원했다.

(40쪽)

 

1757년 프레데르스도르프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의 건강이 오랫동안 나빴던 것이 큰 이유였던 것 같다. 프리드리히 2세와 동성애 이상의 관계를 유지한 프레데르스도르프는 미모의 여인이 그 아름다움을 잃은 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상수시(Sanssouci) 궁전의 자신 침실 곁에 프레데르스도르프를 위한 침실도 마련해두었고 실제로 프레데르스도르프는 이 침실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것을 통해 프레데르스도르프가 프리드리히 2세의 동성 연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것에 동의하는 역사가들도 적지 않다.

(169쪽)

 

마리아 테레지아의 뜻에 따라 프란츠 1세의 장례식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 장례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것이 바로 시신 분리 매장이다. 장기를 적출하여 따로 보존하고 관에는 시신만 안치하는 것이다.

8월 20일 프란츠 1세의 시신에서 부패하기 쉬운 장기들을 끄집어낸 후 빈 곳은 밀랍으로 채워졌다. 시신의 표면에는 소독약을 발랐다. 시신에서 끄집어낸 혀, 심장, 내장, 눈, 뇌 같은 장기들은 에틸알코올에 담갔다가 저장 용기에 바로 옮겨 납땜질을 하고, 나중에 은병에 담겼다. 시신 분리 예식에 참여한 크벤휠러(Khevenhuller)는 더운 날씨 때문에 프란츠 1세의 시신이 예상보다 빨리 부패했고 그래서 심한 악취 속에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고 술회했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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