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읽기 쉬운 마음
박병란 지음|푸른사상 시선 183|128×205×8mm|136쪽|12,000원
ISBN 979-11-308-2116-0 03810 | 2023.11.27
■ 시집 소개
혹독한 겨울을 지내는 이들에게 온기를 전하는 노래
박병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읽기 쉬운 마음』이 <푸른사상 시선 183>으로 출간되었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시인의 시들은 지나온 시간을 토대로 현재의 삶을 견지하고 있다. 고통과 슬픔에 함몰되지 않고 맞선 시인의 노래는 혹독한 겨울을 지내는 이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전해준다.
■ 시인 소개
박병란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2011년 『발견』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가 있다.
■ 목차
제1부 없는 사람이 되었다가 그게 나쁘지만은 않아서
케냐의 나비 떼처럼 아름다웠다 / 여름 식탁 / 해를 만나는 방식 / 덕무 / 그루밍 / 비둘기 무용수 / 리스본의 산책자 / 부록(Anexo) / 앵두와 메리와 똥 / 흰죽 / 봄밤 / 맨드라미 / 계속 이야기를 해봅시다
제2부 우리는 잠시 우리를 남겨놓고
Preserved flower / 여름방학 / 서쪽의 말들 / 폭설 / 제라늄이 모여 있다 제라늄들이 있다 / 고등어의 무늬 / 토마토에 토마토에 토마토가 / 우산은 우산을 반복한다 / 운다 / 파치 귤 / 혼자였어 / 소음 사냥 / 끝끝내 오지 않아서
제3부 꿈속에서 나중까지 오갔다
꽃 이름 대기 끝말잇기 / 선흘의 시간 / 검은 것이 검다고 할 수 없을 만치 끝없어서, 세화 / 가와라마치의 노을 / 감포 / 화엄 / 나의 전부를 알았더라면 / 페와, 에서 / 여름의 감정들 / 닮아간다는 건 얼마나 달콤한 범죄인가 /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 산사나무에 묶어라 / 백조자리 / 어제는 칡꽃
제4부 시를 낭비한 이마가 여기 있습니다
포항초 / 여름에는 여름의 항구를 가지자 / 백합병동 / 내가 아는 숲은 다 졌어요 / 세 박자 쉬고 울고 세 박자 쉬고 귀 열고 / 나는 누구의 최초인가요 / 다시 올 거라는 말 / 거북은 거북이가 될 수 있다 / 물 위의 집 / 모서리 허물기 / 사직서 / 읽기 쉬운 마음 / 살구나무 정거장 / 겨울 산과 딸기와 소란들에게 / 웨이터는 어디서 왔습니까
작품 해설 : 존재와 부재의 계절을 몸으로 쓰다 - 최은묵
■ '시인의 말' 중에서
이끼색 화병에 유칼립투스를 꽂는다
유칼립투스만이 가진 색깔을 찾아
물감을 섞다 보면 시시한 것은 없었다
무엇무엇이 서로에게 서로를 내주는 일
한 가지 색의 고유함보다
무엇과 무엇이 함께 만들어내는 고유함에는
힘이 있었다
식탁 위에는 이끼색 화병과 유칼립투스와
감자 두 알이 힘차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여럿이라서 가능한 일이 자주 일어나던 여름이었다
■ 추천의 글
아프다. 아름답지만 차갑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성에의 아름다움이다. 곳곳에 ‘여름’을 펼쳐놓고 있지만 잇몸 시리게 하는 감정이 자못 얼음의 파편으로 흩어져 있다. “비구름을 몰고 오던 불안”(「여름의 감정들」)과 “날마다 저주를 배달”해주는 “울음의 주문서”(「산사나무에 묶어라」), “물 한 모금에도 허락이 필요”한 통증(「백합병동」)을 견뎌야 하는 참혹이다. 하지만 놀라워라, 시인은 그 차가움을 녹여 마침내 여름의 뜨거움을 주조해낸다. “심지 같은 믿음의 뼈 사이로 살을 도려내” 간(「고등어의 무늬」) 너를 이겨내고, “없는 사람이 되었다가/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여름 식탁」)은 사태를 만난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원래 쇠 맛을 지닌 밑동 붉은 포항 시금치 같은 사람, 선한 것에 무작정 무릎 꿇는 따스한 사람이었던 것. 그리하여 시인은 이윽고 흉방에 위치해 길방을 가리키는 어떤 별처럼 주름의 안쪽으로 깊숙이 자리 잡는다. 극심한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연료로 이웃의 혹독한 겨울에 따스한 온기를 전한다. 마음 시린 이들이여, 시인이 안간힘으로 끓여낸 이 ‘흰죽’ 한 그릇으로 절절한 사랑의 아픔을 끝내 녹여내시라.
― 장옥관(시인)
박병란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매력과 미덕은 정려한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흰죽같이 말없이 내 앞에 앉으시”(「흰죽」)는 시상을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마치 빗방울이 창을 여리게 두드리듯이. 뿐만 아니라 시의 음성에는 사색의 정교한 내용이 담겨 있다. 박병란 시인은 “내 몸에 흐르는 너”(「나의 전부를 알았더라면」)를 관심 있게 노래하는데, 이때의 ‘너’는 가변적이다. 그것은 나를 포함해 이 세계와 모든 존재가 언제든 바뀔 준비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라지거나 미래의 시간에 다시 돌아올 가능성과 그런 예감에 휩싸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가 오거나 오지 않아서 헤매는 마음의 들녘을 이 시집은 가만히 보여준다.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내 마음의 공간인 나의 들녘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 문태준(시인)
■ 작품 세계
심중으로 침잠한 언어는 용암처럼 뜨겁거나 화석처럼 단단하다. 안에 오래 짓눌러 가둔 소리는 몸을 타고 흐르다가 층층 퇴적되어 특정한 시간에 멈춰 굳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침잠의 세계에 머물던 소리가 떠오르기까지는 마땅한 계기가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몸속에서 딱딱해진 세포 덩어리를 떼어내듯 퇴적된 층의 미세한 틈에 칼을 대야만 할 때도 있다. 이렇듯 “끝까지 가서야 끝인 줄 알”게 되는 “곶[串]”(「여름에는 여름의 항구를 가지자」)처럼 막다른 걸음에 이르러서야 느끼는 통증 앞에서 시인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만 할까?
박병란 시집 『읽기 쉬운 마음』은 누적된 통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대한 고요하게 분출시킨다. 이런 몸짓은 마치 혼합된 감정을 낱개로 해체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세상의 가장 조용한 곳, 그러니까 곶[串]처럼 세상의 끝점에서 삶을 반추하는 행위는 시인으로서 박병란이 세상을 딛는 방식이며 이번 시집에서 사유를 발화하는 굵은 축으로 작동한다. (중략)
박병란 시인은 이후로도 온통 몸으로 시를 쓸 것이다. “어디선가는/발견되지 않은 모서리도 있을 것이”(「내가 아는 숲은 다 졌어요」)라는 말이 ‘여름’을 벗어나 다른 계절로 건널 수 있다는 기대라고 본다면 “간벌”을 거친 몸에서 녹여낸 언어는 틀림없이 여름의 감정과는 다른 지점에 놓일 것이다. 「포항초」는 그런 기대를 미리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포항에서 재배되는 재래종 시금치인 “포항초”는 겨울 전후가 제철이다. 가을에서 봄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시금치”는 통증이 아니라 따뜻함이다. 시금치가 있는 “식탁”은 비어 있지 않고 “삼 남매”로 북적인다. “시금치”는 “잇몸을 드러내고 웃”기도 하고, “달콤한 겨울”이 되기도 하고, “삼 남매의 가장”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박병란 시인은 불안에서 통증을 찾아내는 일부터 소소함에서 온기를 찾아내는 일까지 삶의 전반을 폭넓게 아우른다. 이제 몸에 가라앉은 다양한 경험 중에서 무엇을 꺼낼 것인지는 시인이 선택할 영역이다.
― 최은묵(시인)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여름 식탁
사라지는 식탁이 있습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날벌레가 있습니다
사라지는 기분이 있습니다
기분은 왜 아침부터 시작될까요
없는 너를 부르다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가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아서
한꺼번에 몇 가지 기분이 되어보는 우리는,
아침에 사라지는 식탁을 찾습니다
사라지는 것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날벌레로 여름 날씨로 없는 사람으로
고등어 통조림을 싣고 들것처럼 사라지는 식탁은 몇 가지 기분일까요
여름 기분은 아침 다르고 저녁이 다른
침엽수림의 날씨 같아서
없는 사람이 되었다가 없는 너를 찾다가
나의 전부를 알았더라면
우기를 맞은 사원이 붐비기 시작했다 파초 그늘 아래 돌을 젖히고 풀을 뽑는 남자 물을 떠 돌을 닦는 남자 목덜미에 흐르는 땀방울에도 일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대를 견디는 일을 너무 오래 앓아서 이끼의 온도를 잊었다 젖어 드는 발목을 숲에 두고 향신료 창고의 오색 가루처럼 시시각각 들뜨는 나를 달랜다
비의 주파수를 연주하는 숲의 선율
열대의 눈물 양동이에 꽂히는 비
단 한 번뿐이기에 그대를 물어물어 여기까지 왔다
너무 많아 모르는 나무가 내 몸에 흐르는 네가
아무도 없는 먼 곳에서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내가
산짐승의 목을 비틀어 피를 바치는 행렬이 오후의 염원을 새기는 이곳 재단에 놓인 풀반지는 잊기로 하자 죽은 신과 눈을 마주치는 일에도 허술해서는 안 된다 숲은 무분별한 일요일의 낙담 같고 침묵보다 아름다운 말이 있었다면
나의 전부를 알았더라면 떠나지 않았을 사람 빗소리가 사원을 에워쌀 때쯤 비가 그친다 일을 마친 남자는 돌을 등에 지고 집으로 간다 끝내지 못한 말들은 잠시 우리에게 남겨놓고
읽기 쉬운 마음
우리는 왜 그토록 화가 나서 각자 문을 닫았나. 말하다 말고 서로를 남겨둔 채 하루 번갈아 하루씩 입을 다물고, 건드리면 걷잡을 수 없이 연약한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다. 부목처럼 힘이 다 빠져 언제 휩쓸릴지 모르는 우리, 형편없이 덧댄 쪼가리같이, 저만치 벗어던진 신발 한 짝같이, 함께 살아도 같은 마음인 적 있었나. 어쩌자고 일요일마다 비가 내렸나,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문이 없는 곳에 매단 달력처럼 어디서 노크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았을, 병은 아픈 것이 아니라 서러운 것, 병을 얻고부터 하루도 슬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너무 멀쩡해도 너무 아파도 우린 제대로 설 수 없을 거야, 하나에서 열까지 세는 동안 방문 앞을 서성이는, 읽기 쉬운 마음이 모여 사는 섬, 물음표와 감탄사를 한 몸에 지닌 까닭에 때때로 그 마음은 자주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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