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독일 제국의 통일이 증명한 교훈 "힘의 공백 발생 시 통일 가능"
19세기 독일 통합과 제국의 탄생/ 김장수/ 푸른사상/ 2만2000원
‘19세기 독일 통합과 제국의 탄생’(푸른사상)은 독일의 통일 과정을 설명한다.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냉전을 허물면서 무너진 뒤 진행된 재통일 이전 첫 통일을 다룬다.
나폴레옹 전쟁(1803년~15년) 후 영국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프랑스 등 5개국은 빈 회의(1815년)를 통해 들어선 빈 체제에서 프랑스 혁명(1789년) 이전으로 복귀해 정통주의를 견지한다는 게 목적임을 분명히 밝혔다. 특히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분열돼 있던 독일은 빈 체제 결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비롯한 39개의 국가로 구성된 연합체제의 연방으로 재탄생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 각국에 불어닥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바람은 독일에도 안착했고, 독일인들 사이 통합을 염원하는 목소리는 커졌다. 그리고 1815년 학생단체 부르셴샤프트를 시작으로 독일권 지식인들 사이 빈 체제의 붕괴는 통합을 위한 필수요소라는 인식이 퍼졌다. 저자는 부르셴샤프트를 기존의 학생단체와 다른 새로운 형태라고 평가했다. 1848년 빈과 베를린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나 빈 체제의 실세였던 폰 메테르니히(1773~1859년)가 실각했고,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설치되기도 했다.
저자이자 역사학자인 김장수 교수에 따르면 독일 통일은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98년)의 등장으로 본격 가시화됐다. 프로이센은 덴마크 지배를 받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오스트리아와 함께 점령했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두고 양국은 갈등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골자로 하는 대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민족끼리 통일을 지향한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가 대립했다.
이는 보오전쟁(1866년)으로 이어졌는데, 프로이센은 7주 만에 승리를 거두고 연방에서 오스트리아를 퇴출하는 대신 중앙권력을 가진 북독일연방을 창설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독일의 통일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돌아간 보불전쟁(1870~71년)을 끝으로 완성됐다. 프랑스가 독일 통합에 부정적 입장을 가졌다고 파악한 비스마르크는 개전을 철저히 준비해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1808년~73년)를 포로로 잡는 등 굴욕을 선사했다. 이어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궁전 내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이와 함께 프랑스가 50억프랑과 엘자스-로트링겐를 할양하는 것으로 독일 통일을 완성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독일 통일은 당시 열강 간의 힘의 공백기에서나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 다수 비율을 차지했던 헝가리 민족의 봉기를 수용해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 선포(1867년) 이후 어수선한 상태였다. 영국은 해외 식민 경영에 열중, 러시아는 크림 전쟁(1853년~56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독일의 이러한 통일 과정은 한반도에도 시사점을 준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 사이에 껴있어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위치에 서 있다. 또 일본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고 있다. 종합하자면 힘의 공백기는커녕 폭풍전야와도 같은 상황을 맞이한 한국에는 통일 문제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요구된다.
세계일보, "19세기 독일 제국의 통일이 증명한 교훈 "힘의 공백 발생 시 통일 가능"", 김찬영 기자, 20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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