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흰 말채나무의 시간
최기순 지음|푸른사상 시선 119|128×205×10 mm|156쪽|9,000원
ISBN 979-11-308-1561-9 03810 | 2020.2.15
■ 도서 소개
감추어진 존재들을 불러내는 눈부신 언어들
최기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흰 말채나무의 시간』이 <푸른사상 시선 119>로 출간되었다. 다채로운 꽃들이며 사물과 상황, 정서, 관념 등을 감각적이면서도 사색적인 비유로 형상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맑은 눈으로 내면까지 투시하고 있다. 첫 시집 『음표들의 집』(푸른사상 시선 25) 이후 한층 깊어진 시인의 세계인식이 눈부시다.
■ 시인 소개
최기순(崔基順)
무겁게 눈이 내려 쌓이고 연기 가득한 아궁이에서 생솔가지가 탔다. 매운 연기를 참으며 눈 위에 발자국을 눌러 꽃문양을 찍는다. 손전등을 비추고 웅성거리며 지붕 추녀 속 참새를 꺼내 구워먹고 시커먼 입술로 휘파람을 불어대는 사내애들을 없는 척 지나간다. 온종일 걸어도 벗어나기 힘든 눈의 감옥, 밤새워 읽은 제인 에어의 팔짱을 끼고 추위에 몸을 떨며 발이 푹푹 빠지는 눈보라 속을 지치도록 걸었다. 외적 환경은 달라지고 나이가 들었지만 시를 쓰는 의식 저변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막막하고 추위를 느끼며 아직 시를 쓴다. 2001년 『실천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 『음표들의 집』이 있다. (E-mail : thelilycks@naver.com)
■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풀들은 눈물방울 같은 이슬을 달고
아침 / 떨림에 대하여 / 버드나무 유르트 / 느티나무와 청동거울 / 라면이라는 곡선 / 흰 말채나무의 시간 / 벤치 위의 날들 / 새들의 수렁 / 공작새는 어떻게 날아오는가 / 거미집에 대한 짧은 견해 / 아스팔트 위의 고양이들 / 분홍 돔 / 달팽이
제2부 내장처럼 질긴, 양귀비꽃처럼 허무한
바람은 / 호수 / 수선화꽃 한 다발 / 달걀 / 공원 거주자 / 구름의 일가/ 식물의 감정 / 일기예보 보는 사람 / 동토 일기 / 장미꽃 폭설 / 겨울 호야 / 무의도(舞衣島) / 토가족 남자 / 꽃 피는 쿠션들
제3부 우뚝 멈춰서는 적막의 이름들
먼 어머니 / 아버지의 이름으로 / 사과나무들은 침묵하고 / 나의 바그다드 카페 / 꽃 핀 자귀나무 / 저녁의 행보 / 산북 마을, 그 먼 / 산현리 / 구르메 / 퇴적암 / 국수와 비 / 매화꽃과 사내 / 포플러 상가(喪家)
제4부 우리는 종종 밤늦도록
아침 물결들의 호수 / 동백 엔딩 / 꿈에 울다 / 청보랏빛의 말 / 오동꽃 / 연성(蓮城) / 새와 구두 / 겨울 구근 / 할머니의 밭 / 이명 / 주홍집시나비 / 침몰 / 밤의 산들공원 / 껍질의 시간 / 가든, 무릉도원
제5부 아직 깨어 있는 마지막 새들을 위하여
축제 / 여의도 비가(悲歌) / 숲속의 독서 / 엄마들의 봄 / 목련 나무 아래로 / 군들 / 외가가 있던 마을 / 수원엔 비가 내리고 / 장미향의 욕조 / 푸른 호랑이 눈 / 광장에서
■ 작품 해설:이원시, 죽음을 예각하는 견성의 언어 - 손남훈
■ 시인의 말
어둠에 눈이 익으면 어둠에 눈이 밝아져 불빛 없이도 길을 걷는 것처럼 내 시의 편린들은 의도적이든 그 반대이든 가려진 세계에 관해서, 감추어진 존재들을 소환해내는 일에 오히려 동물적 감각이 눈을 뜬다
■ 추천의 글
식물학자의 말을 빌리면, 말채나무의 가지는 가늘고 길어 잘 휘어지고 질긴데, 말을 몰 때 채찍으로 쓰기 좋아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고 한다. 최기순 시인은 말채나무를 들고 “움직임을 멈춘 채 굳어있”는 “말들”의 “등줄기를 후려쳐”보고 있다. “말”은 말(馬)이자 말(言)일 것이다. 얼어붙은 빙하기를 견디며 자신의 말이 달리도록 고통스럽게 싸운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찾아낸, 첫 시집 『음표들의 집』 이후 한층 깊어진 시인의 세계가 눈부시다.
― 고운기(시인·한양대 교수)
최기순의 시들은 시간을 견디며 공간을 배회한다. 그 서성거림의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있고 말채나무가 있고 청동거울이 있다. 시인은 그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때로는 맑은 눈으로 때로는 깊은 마음으로 내면을 들여다본다. 시인의 발걸음은 엉성한 듯해도 붙잡는 것들이 많다. 거미줄이 그렇고 “새가 날아간 자리에 나무의 진동이” 그렇다. 과장된 눈물이나 곱씹어 덧나는 상처가 없다. 오히려 그의 작업은 “무의미하게 멀리 오래” 걷는 것 같지만 멈추지 않고 늘 흐른다.
― 박홍점(시인)
■ 작품 세계
최기순 시인의 시는 이원시로 쓰여졌다. 그의 시는 압도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들이 중추를 이루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대상 사물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각적인 시선으로 봄으로써 대상에 대한 감응을 길어 올리고 있다. 다른 많은 시편들이 직관의 상상력을 추종하는 데 바쳐져 있는 데 비해, 최기순 시인의 시편들은 ‘직관의 신화’를 의심하고 그로부터 한 걸음 거리를 둠으로써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의 특징들은 단순히 시작 방법론이나 시의 미적 구성의 측면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최기순 시집의 전반적인 세계관과 경향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중략)
그렇다면 이제 시인은 왜 죽음에 집중하는지를 따져보도록 하자.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문제는 우리의 삶의 양식 안에서 죽음은 늘 소외되어 있다는 점이다. 문명사회는 마치 인간 존재의 불멸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환상8하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은 더욱더 고립되는 양상을 자주 보이고 있다. 특히 모든 것이 상품으로 대체되는 현대인의 삶의 양식에서는 상품의 지속적인 생산과 그 생산된 상품의 계속되는 소비를 통해 불멸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인은 “도시”, 이마를 쓸어주고 얼굴을 묻게 할 뻔한 “버드나무를 둥글게 휘어” 만든 “전통가옥 유르트”와 구별되는 그곳을 낯설고 차가운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시인은 유목민과 마찬가지로 “유르트”를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도시”를 “낯선 곳으로 낯선 곳으로만 흩어지”게 하는 곳으로 여긴다. 온통 죽음뿐인 세상에서 오히려 죽음을 배제하는‘ 낯선’ 곳이 바로 문명사회를 상징하는 “도시”인 것이다. 최기순 시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떠돎과 고립의 자세는 죽음이 배제된 공간에서 오히려 죽음을 감각하는 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론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공원 거주자」 「구름의 일가」 「동토 일기」 「저녁의 행보」 등 여러 시편에서 편재(遍在)된 배제와 고립, 떠돎의 상황들은 궁극적으로 상품물화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반성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촉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남훈(부산대 교수·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흰 말채나무의 시간
유리창마다 성에가 흰 말채나무를 키운다
한파가 몰아칠수록 창문의 말채나무는 숲을 이루고 온종일 켜놓은 화면에선 물결이 솟구치다가 순간 얼어붙는다
국경의 가시 철조망 낙화처럼 물결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소년의 맑은 눈동자에 큭! 예기치 않은 울음이 터지지만 그것은 의자를 보면 주저앉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의 말들은 고삐를 매지도 않았는데 움직임을 멈춘 채 굳어 있다 말들을 어서 달리게 해야 해 단단히 고삐를 틀어잡고 채찍을 휘둘러보지만 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마 잊혀져가는 스스로의 발굽 소리를 듣는 듯하다 다시 채찍을 들어 말들 대신 등줄기를 후려쳐 본다
턱을 괴고 앉아 흰 말채나무나 바라보는 날들이다 유리창을 꽉 채운 흰 말채나무 가지들처럼 모든 것은 얽혀버린 채 굳어 있다 서로 완강하게 소외되어 얼어붙은 눈동자와 혀가 풀릴 때까지 이 빙하기를 견뎌야 할 것이다
산북 마을, 그 먼
키 큰 전나무 숲 군사기밀도로가 전부인 마을은
겨울이 깊을수록 흰 산이 우뚝 솟아올랐다
시렁 위 싹을 틔울 감자들 아직 눈이 깜깜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고모들 구부러진 못처럼
박혀
양말을 깁고 가마니를 짜고
무채와 말린 산나물을 섞어 밥을 짓는 어머니는
철산 겨울이 맞닥뜨린 범의 숨소리 같다고
마당의 빨래들 뻣뻣하게 언 채로 눈을 맞고
눈송이들이 창호지에 보푸라기처럼 달라붙는 밤
할아버지의 느릿한 옛이야기는
추녀 끝 고드름을 단단한 직선으로 내려 키운다
등불 건 툇마루까지 눈이 쌓이고
소맷부리 해진 옷을 머리맡에 두면
꿈의 장막이 열리면서
가오리연이 새하얀 꼬리를 흔들며 유영하고
눈의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은하수를 흩뿌리며 달아났다
참새 떼가 새파란 공중을 향해
언 나뭇가지를 차고 오르는 아침
눈부신 햇살에
시리고 맑은 향의 구슬들이 챙챙챙 쏟아져 내렸다
광장에서
촛불도 구호도 이제는 그만.
이곳에
연못을 파고
노랑 어리연을 띄우면
잎사귀 아래 개구리밥들
순식간에
초록 카펫을 펼쳐놓겠지요
물결이 일 때마다
수많은 주름들 접혔다가 펴지겠지요
제 몸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다리가 긴 물거미가 성큼 건너가면
장구애비 애벌레들 용케 알고
뽀글뽀글 진흙 물방울 일으키겠지요
지나가는 구름이 농담처럼
빗방울 몇 던지면
여기저기 푸른 동심원들 보조개 피겠지요
오고가는 사람들 순간 밝아오는 표정을
노랑 어리연 봉오리들
실눈 뜨고 물속에 반쯤 잠겨 훔쳐보겠지요
동그란 잎사귀들 겹쳐진 사이사이로
초여름 햇빛 잠깐씩 눈부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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