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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미디어서평

[세계일보] 정세훈, <파지에 시를 쓰다>

by 푸른사상 2019. 10. 2.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이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다

정세훈 산문집 ‘파지에 시를 쓰다’ 출간

“내 나름대로 시를 붙잡고 씨름을 해보았지만 그 결과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 신통하지 못하다. 실패한 시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중견 시인이 있다. 어려운 고백이다. 문학평론가 박형준은 이에 대해 “실패는 아프다. 그것은 자기 생의 내력을 온통 부정하는 행위이자, 부조리한 사회의 변혁 가능성을 유예하는 인정 형식이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삶/시를 스스로 ‘실패의 역사’로 규정하는 것은 그래서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두둔한다.

 

자칭 타칭 노동자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정세훈(64) 시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자본의 축적 공간인 서울과 부산을 거쳐 인천 부평공단에서 반평생을 보낸 노동자 시인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정초하기 위해 공장 파지에 꾹꾹 눌러 쓴 시어는 노동자의 계급적 목소리를 발화하는 미적 사보타주인 동시에, 정규화 된 노동조합이나 계급적 거처를 갖지 못한 프레카리아트(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 노동 계급을 가리키는 신조어)를 감각하는 심미적 통각이다.


정세훈 시인은 최근 자전적 산문집 ‘파지에 시를 쓰다’(푸른사상)를 출간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시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은 시인의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스스로 실패와 패배를 말하지만 그의 삶과 문학이 누구보다 치열했음을 엿볼 수 있다.

 

책은 정 시인이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접하고 처음으로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홍성 소년의 노동과 문학의 역정을 담고 있다.

 

노동자 시절 그는 마땅히 잘 곳이 없어 대형 냉동고나 가마솥에 숨어 지내야 했고, 취객에게 얻어맞다가 징역까지 살았다. 어렵사리 영세 에나멜 동선 제조업체에서 자리를 잡았으나 석면과 독한 화공약품 등에 노출된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건강을 잃는다.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한 대가로 얻은 것은 직업병뿐이다.

 

그는 문학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공장 작업장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파지에 시를 끄적거렸다. 세상은 그를 노동자 시인이라 부른다. 시를 통해 그는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사이의 연대를 강조한다.

 

“17세. 너무 이른 나이에 육체노동자가 되어 노동을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노동자를 알게 되었고 노동을 알게 되었다.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을 포기해야 하는 것임을, 노동은 자본의 노예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았다. 이러한 노동판이 문학을 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견디어온 삶이기에 어느 한때 어느 시기를 살펴보아도 제대로 내세울 만한 성공한 삶이 한순간도 없다.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결과가 이를 막고 있다. 실패한 노동! 그 삶들을 호명해 기록한다.”

 

60대 중반에 내놓은 시인의 진솔한 자기 고백에 우리는 고즈넉이 옷깃을 여민다.

 

시인 자신은 스스로를 실패한 노동이라고 규정한다. 그 스스로는 자신의 인생과 문학을 성찰하며 그렇게 규정할 수 있겠지만, 노동과 노동자의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온 그의 삶을 누가 감히 실패라 할 수 있을까.

 

세계일보,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이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2019.10. 2

링크 : http://www.segye.com/newsView/20191001513583?OutUrl=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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