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절실해 떠난 강단 …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할 뿐”
퇴임교수가 사는 법_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출간한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
때로는 한 국가의 지식인으로서 냉철하고도 날카롭게, 때로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이 나라, 이 사회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교수가 있다. 현재 <교수신문>에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을 연재하고 있는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다.
독문학자이지만 우리말로 글을 쓰고 소설을 쓰는 것이 행복하다는 서 명예교수는 어느 날 강단에서 내려왔다. 이유는 ‘소설가’로서 좀 더 매진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2001년 『열하나 조각그림』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 첫 발을 내딛은 후 이화문학상(2004년), 제6회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2013년), 제30회 PEN문학상 문학활동상(2014년) 등 다양한 수상경력 또한 갖고 있다.
“왜 소설을 쓰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 교수는 본인의 소설 작품 끝에 실었던 ‘작가의 말’ 한 구절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순간이면 ’새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퇴임 이후 소설가로서 새 삶을 살고 있는 서용좌 명예교수를 서면으로 만나봤다.
△중학생 때 교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소설가를 꿈꾼 배경이나 계기가 궁금하다.
“소설가?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을 했다기보다는, 우연한 기회에 그리됐다. 2001년 얼결에 『열하나 조각그림』이라는 장편을 발표한 것이 문단에 디딘 첫 발이었다. 독문과 졸업한 제자들 가운데 출판사를 차렸다고, 글 좀 내자고, 수필이라도 출판하자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비밀이 터져나와버렸다. 수필은 말고, 소설이라면 끼적거리고 있노라고. ‘막고 품는다’는 말을 아는지 모르겠다. 둑을 막고 물을 모조리 퍼내면 고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쓰는 말이다. 옛날에는 부족한 실력으로 교수가 되고 했으니, 무조건 뿌리째 또는 송두리째, 중요성의 경중을 따지기 이전에 모조리 공부하는 방식이라서 시간을 많이 써야 했다. 전공이 독일소설이었는데, 공부를 하다하다 지치면 나도 모르게 ‘소설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소설쓰기가 무엇인지 배워 본 적도 없이. 무엇보다 외국어에 매달려 살면서 그 반작용으로 우리말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제목에서와 같이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자 했나.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이다. 유토피아란 아무데도 없는 곳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에. 더구나 오늘 이 땅의 삶이 점점 녹록치가 않다. 국민총생산이니 하는 지표의 성장과는 무관하다. 한 겨울에도 집이 따뜻하다 못해 반쯤 벗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라고는 하나, 우리들 마음속 어디에도 온기라고는 없다. 사회라는 궤도에 들어가기 위해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뇌세포는 주판알 굴리는 상처로 피범벅이다. 특히 지식을 환전하지 못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느끼면서 애달파 하다 보니, 그들을 위해 글을 쓰게 됐다.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픔을 보듬고 살아간다. 그런 것들을 확인하면서 막연하게나마 동료애, 인류애 같은 것을 되살려 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유명한 시인의 시구이지만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는 담쟁이넝쿨의 이미지를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있다.”
△퇴임 이후의 삶은 어떤가. 강단에 있을 때와는 여러모로 달라졌을 듯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퇴임’이란 단어는 생소하다. 곧 다가올 정년을 기다리지 못하고‘명퇴’를 한 것은 충동이자 절실한 선택이었다. 강의하던 것을 정리해서 『도이칠란트. 도이치 문학』으로 내놓고는 회의가 깊어졌었다. 평생 공부한 것이 이 부끄러운 수준이구나, 해도 해도 잘 안 되는 것 그만 하자, 교수라면 객관적으로 책임이 막중하지만 글 쓰는 일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겠지……. 그래서 교단을 떠났다. 소설로 등단은 했었지만 여전히 무명이었고, 그건 지금도 그렇고, 그래도 무작정 한 가지 일에 몰입하련다는 심정이었다. 그때로서는 내 소설에 독자를 얻을 일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쓸 일이 절실했었다. 또 다른 고통이 밀려올 것을 예감하지 못한 채로. 선택, 그러니까 앞서 말 한대로 하이에나처럼 사는 일을 그만두고서, 그럼 만족하느냐? 최소한 문학작품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일차적 작품을 쓰는 일이 그리 좋으냐?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글로 살고 있다는 점에서 뭔지 모를 행복감을 느낀다. 소설가로서의 불발은 행복한 고민에 속할 것이다.”
△이번 소설에는 “나는 글을 쓴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라고 선언한 크리스타 볼프의 말이 등장한다. 소설가로서 생각하는 어떤 ‘신조’ 같은 건가?
“‘…… 그러므로 살아있다’라는 명구에는 숱한 변형들이 있다. 글 쓰는 사람들의 경우 누구에게나, 글을 쓰느라고 살아있다는 말은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밀도가 강하리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도 신조 같은 것은 정립해놓고 살지는 못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하는 것, 그것으로도 벅차다. 오늘 살 수 있다면 공들여 살 것이고, 오늘 쓸 수 있다면 정성들여 쓰는 것뿐이다.”
△후배 교수들에게, 혹은 학문후속세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후배 교수들, 특히 인문학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뭔가 말해도 된다면, 자긍심을 가지고 현실을 버티자는 것이다. 늦게라도 다른 현실이 필연코 닥친다. 학자들에게는 그렇게 만들 책임도 있다. 문학과 문학연구를 포함해서 인문학은 사람에 관한 학문이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사람의 도구에 관한 학문들이 사람에 관한 학문을 추월하여 학계를 주도하고 ‘자본주의의 돈’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이 현실이 영원할 리는 없다. 진자운동을 생각한다. 인류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진자운동 같아서, 감성과 이성이 주도하는 시대상이 번갈아 나타난다. 합리적 계산의 과학이 그네의 최고점에 다다르면 그만 내려오고, 그네는 다시 우아하게 다른 쪽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틀림없이 멋진 호의 곡선을 그리며.”
- [교수신문] 김홍근 기자 20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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