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버릴 때 새로운 것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은 그늘을 이루는 중요한 원리이다. 시인이 자신의 시적 원리를 여기에 두고 그것을 향해 밀고 나간다면 삶의 진정성은 물론 미의 진정성 또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늘의 원리를 포스트모던 시대다 기술 복제 시대다 하여 이미 한물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해버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내세운다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무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오랜 숙성의 시간과 깊이와는 다른 삶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늘의 원리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숭고의 원리가 새롭게 조명되고 부상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더욱이 현대예술 중에 시라는 장르의 역할은 이 타락하고 세속화된 시대에 신성하고 숭고한 세계의 존재성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또 암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최은묵 시인이 보여준 그늘의 세계에 대한 탐색은 주목에 값한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그늘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한 몇몇 원리들은 시인이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시에 그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인의 시쓰기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여기에 이르는 길에는 그늘의 원리가 말해주듯이 세계 속에서 맺힌 응어리를 어르고 삭이고 풀어내는 과정에서의 진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시인의 시 세계가 너무 얕고 투명한 경우에는 깊은 소리를 낼 수 없다. 이에 반해 그것을 오랜 시간 어르고 삭이고 풀어내면서 온갖 신산고초를 경험한 경우에는 깊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시인의 시의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다면 그 깊이를 확보하는 데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시인의 시쓰기의 한 원리로 그늘이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깊이를 확보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 시인은 시 속에서 그것이 의식적이든 아니면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그늘의 원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앞서 많은 언급을 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늘에 이르기 위한 시인의 공부는 아무리 강조해도 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만큼 그늘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소리꾼에게 최고의 찬사가 ‘당신의 소리에는 그늘이 있어’라는 말이듯이 시인에게 최고의 찬사는 ‘당신의 시에는 그늘이 있어’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시의 중요한 질료 중의 하나인 ‘새’와 ‘날개’는 자주 이 그늘의 깊이를 재는 척도로 사용된다. 시인에게 새와 날개는 상승만이 아니라 하강 혹은 추락의 의미로 드러난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하강 혹은 추락을 통한 상승’이다. 시인의 논리대로라면 하강하고 추락하면 할수록 더 상승하고 또 비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반대일치라는 역설의 원리는 서로 상대되는 것을 배제하거나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용하고 융화하는 우리의 독특한 사유 체계(사상이나 철학 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새들의 발자국을 바닥까지 데려가려면 더욱 젖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위해 시인은 새의 ‘날개를 떼어’낸다. 시인이 이렇게 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깊게 젖어야 깊이를 알 수 있는 세상”(「물의 깊이를 재는 법」)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날개를 떼인 새가 추락하여 깊게 젖어야 그만큼 상처도 클 것이고, 이렇게 되면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맺고 어르고 삭이고 푸는 과정이 이어져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오래된 통증은 새와 내가 원래 한 몸이었다는 심장의 울림”(「그림자 새」)이라고. 시인의 고백에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것은 새의 그림자가 나(혹은 나의 그림자가 새)라는 눈에 보이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 새와 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오래된 통증만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는 그늘의 세계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늘의 깊이 혹은 시의 깊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 해설 : 이재복(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중에서
2. 추천의 말
주체의 감각과 세계가 만나는 접점에서 터뜨리는 불꽃이 최은묵의 시다. 그 불꽃은 뜨겁지만 서늘하여 밀도가 높고, 허투루 얕은 기교에 휘둘리지 않는 시의 중핵이다. 대개 체험의 압력이 강하면 시가 거칠어지거나 직설적이 되지만 그의 시는 미학적으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준다. 어느 한쪽에 경도되지 않고 그가 일궈내고 있는 시의 영토에는 신선한 감각과 이미지가 흘러넘친다. 시가 감각의 경련이고 사유에 선행하는 이미지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최은묵 시인은 우리 시단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미지의 전사다. 정형화된 서정적 문법에 갇히지 않고 끝없이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며 시쓰기에 진력하고 있는 최은묵 시인은 “전기면도기에 살고 있는 곤충이 토독토독 수염을 먹어 치”(「구두를 벗다」)우는 현상을 보면서도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땅의 문」)하고, “이 방은 우물이고/말라버린 우물은 대부분 무덤의 통로였다는 걸”(「나는 옆방 사람이었다」) 감각하는 놀라운 시안과 촉수를 가진 시인이다. 현상과 존재의 이면을 섬세하고 폭넓게 읽어내는 최은묵의 시가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 홍일표(시인)
등이 시리고 손톱이 짓무르도록 벽에 달라붙은 채 살아온 시인의 그림자가 못박힌 틈새를 빠져나와 들판을 날고 있다. 날아가는 동안 또 다른 벽과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만 부화를 기다려온 그림자는 탯줄을 꺼내 하늘을 향해 귀를 열고 바람의 결에 몸을 맡기고 있다. “바람은 날기 위해 그림자를 그늘에 둔다”(「틈, 바람의 그림자」)는 것을 생의 이치로 발견한 시인은 자신의 그림자를 저항하는 존재로 회복시켰다. 그리하여 햇살과 나비와 아침과 등대와 지도와 새들과 소독과 여유 등이 동행한다. “아래가 두렵지 않”(「종이비행기」)기에 “부러진 자리에 새살이 돋게 모래사막까지 창문을 내”(「창」)려고 하는 시인의 그림자여, 활짝 등을 펴고 별빛이 반짝이는 하늘까지 아름답게 날아가거라.
제1부
벽지
자기소개서
눈병
첫
구두를 벗다
밤 외출
이주
자화상
목선(木船)
초보 촌부일기
판화
그믐달
나는 옆방사람이었다
도플갱어
치과에서
제2부
강냉이
고등어 편지
정호네 아버지
붕어빵
둥지
구멍 난 양말
손
신바람 만두
아버지의 냄새
타임머신
방석 오리
봄밤
한지를 덮고
파꽃
홍옥
제3부
여름 마중
덧거리
집
훌훌,
구름의 언어
산이 움직인다
봄꿈
마네킹 그녀
뚱뚱한 웃음
틈, 바람의 그림자
종이비행기
고래무덤에는 등대가 있다
멍
가정식 백반
하프타임
제4부
엄마의 말
나오는 사람들
월요일 오후
낮달이 떴다
땅의 문
물의 깊이를 재는 법
하루
골목길
보육원 아이들
이별
그림자 새
헛묘
투명인간
창
거룩한 고물상
알몸으로 가야하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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