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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맛있는 시] 중앙동(2013-06-07)

by 푸른사상 2013. 6. 7.







숟가락처럼 닳아서

초승달만큼 닳아서

낮은 문턱을 넘어 밤이 된다


그에게는 내가 모를 무슨 연유가 있을 거다


눈이 부시게 막막했던 한낮

친절하지 않았던 사람들

서성이는 바람


문턱을 넘어 날아온 은행잎

밤의 구두는 얼마나 넓고 깊은지 잴 수 없다


은행나무와 나란히 건널목 신호등 옆에 선다

다리를 저는 개를 따라 지하도를 건넌다


새로운 동행과 어긋난 길을 걸어

밤의 주름진 구두 안으로 들어간다


-이선형의 '중앙동'(시집 '나는 너를 닮고' 푸른사상·2011)


현 대인은 단절과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때 중앙동은 화려했다. 사무실이 밀집해 있어 점심 때부터 출렁거리기 시작한 거리는 화려한 밤 풍경을 연출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주말과 휴일이면 한적하다. 가게는 문을 닫고 뒷골목에 자리 잡았던 포장마차도 떠난 지 오래다. 낯익은 얼굴들도 떠나고 일찍 진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굴러다닐 뿐이다. 건널목에서도 지하도에서도 동행은 늘 길이 어긋났다. 일과를 끝내고 귀가한 샐러리맨이 벗어 놓은 구겨진 구두에서 중앙동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중앙동에 빛이 살아야 부산이 출렁거릴 수 있다. 그곳에 꿈이 있다면.












강영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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