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산문)
어찌 세월이 가만있었겠는가
곽광수, 김경동, 김명렬, 김재은, 김학주, 안삼환, 이상옥, 이상일, 이익섭, 장경렬, 정재서, 정진홍 지음
숙맥 16|153×224×18mm|304쪽|22,000원
ISBN 979-11-308-2126-9 03810 | 2023.12.23
■ 도서 소개
숙맥임을 자처하는 이 시대의 선비들이
펼쳐 보이는 다채로운 인문학적 사유의 세계
숙맥 동인지 발간 20주년 기념호인 숙맥 16집 『어찌 세월이 가만있었겠는가』가 푸른사상사에서 출간되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 대학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학문에 대한 교류를 목표로 수필집을 내기로 9인이 뜻을 모아 2003년 숙맥 동인지의 첫째 권이 출간된 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떠난 회원과 새로운 동인이 합류한바, 현 회원 14인 중에서 이번 호에는 12인의 글을 수록했다. 수필을 중심으로 논평, 서평, 예술평론, 여행기 등 신변잡기적인 글들마다 숙맥임을 자처하는 이 시대 선비들이 펼치는 다채로운 인문학적 사유의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저자 소개(전공 및 대학)
곽광수_ 불문학 서울대학교
김경동_ 사회학 서울대학교
김명렬_ 영문학 서울대학교
김재은_ 발달심리학 이화여자대학교
김학주_ 중국고전문학 서울대학교
안삼환_ 독문학 서울대학교
이상옥_ 영문학 서울대학교
이상일_ 독문학 성균관대학교
이익섭_ 국어학 서울대학교
장경렬_ 영문학 서울대학교
정재서_ 중국고전문학 이화여자대학교
정진홍_ 종교학 서울대학교
■ 목차
책머리에
곽광수_ 프랑스 유감 IV-10
김경동_ 요지경 속 언어생활 문화의 변천
김명렬_ 친구 / 샌프란시스코
김재은_ 한계 인식 / 아직은 우리가 일본을 이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쟁 중에도 공부를 했다
김학주_일을 하면서 / 군자의 올바른 행실 / 우리나라의 나라 이름에 대하여
안삼환_평생의 궁리 / 이무기와 깡철이 / 바이마르 산책
이상옥_문식이네 집 사람들 / 내 대학 동기생 김용년 / 기억이 부리는 조화 / 들꽃 찾아 반백 년
이상일_늙은 천재 / 관념을 억누른 긴 팔의 비행 형상 / 센티멘털리즘의 극치에 이른 많은 서사의 쓸쓸함과 원숙미 / 반골 정신: 잡학과 순수를 때 묻히는 천격의 쓰레기 예술까지
이익섭_장수싸움 / 고향 / 위당 선생의 퇴고
장경렬_“어찌 세월이 가만있었겠는가” / “아직까지 현수를 기억하고 있나” / “조심해서 가게나” / “그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정재서_자연인 되기의 괴로움 / 저자가 말하다 / 문자의 근원적 힘을 전유하라!
정진홍_버킷 리스트
숙맥 동인 모임 연혁
■ 책머리에 중에서
1950년대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다녔던 여덟 사람이 문리대 출신은 아니나 문리대 사람들보다 더 문리대인다운 풍모를 지닌 분을 좌장으로 모시고 동인 모임을 구상한 것은 2003년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학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오랫동안 학술 연구에 몰두하던 사람들이 스스로 숙맥菽麥이라 칭하며 동인 모임을 가지기로 한 데에는 단순히 노년기의 친교나 파적破寂을 도모하자는 뜻 이상의 동기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195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며 지적·문화적 탐구를 갈망하던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일종의 향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개별적 향수가 문리대 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겹겹이 쌓인 공동체로 수렴된 것이 우리 숙맥 동인 모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략)
문리과대학은 문과와 이과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기초 학문 분야가 집결되어 있던 곳으로 명실공히 학문의 전당이었습니다. 문리대에서는 모든 분야의 학도들이 하나의 마당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덕분에 우리는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개개 학문 간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나들며 인접 분야에 대한 관심과 식견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롭고 분방한 학문 분위기에서 자아내어진 집단적 교양이랄까 뭐 그런 소중한 성과를 누구나 능력껏 나눠 가졌습니다. 그러나 1975년에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문리대는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로 삼분되었고 이 세 단과대학 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학문 분야들이 자기 폐쇄적으로 세분화되는 것을 근심스럽게 지켜보던 우리가 그 옛날 마로니에 캠퍼스의 포용적인 학문 풍조에 대한 향수를 절감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학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공통분모로 삼고 모인 아홉 사람이 ‘숙맥 동인지’의 첫째 권 『아홉 사람 열 가지 빛깔』을 낸 지 어언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동인지는 그 성격이나 편집 방향에 대한 숙고와 논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스무 해 세월이 꽤나 길었던지 그간 우리는 창립 회원 두 분을 여의었습니다. 그 대신 일곱 사람을 새 회원으로 맞아들였는데 그중의 네 분은 1960년대 혹은 70년대의 동숭동 캠퍼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우리 모임은 한참 젊어졌고 동인지에도 신선한 새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숙맥 동인지’가 매번 면모를 일신하면서 보다 번듯하고 보다 알찬 간행물로 성장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책 속으로
법원 앞 광장을 오른쪽으로 두고 왼쪽으로, 이런저런 건물들을 면한 길을 따라가면, 시계탑이 있는 건물이 나오는데, 논문 발표를 앞두고 내가 드 라 프라델 교수를 우연히 만난 곳이 거기에 미치기 전 어느 장소였었다. . . . 시계탑 건물을 지나면, 왼쪽으로 탁 트인 공간이 보이는데, 광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의 넓이를 가진 빈 공간이다. (곽광수, 「프랑스 유감 IV-10」, 16쪽)
특히 오늘날의 문명사적 관점에서 명심할 것은, 지금은 온 세계가 K-문화 배우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우리의 소중한 한글과 우리말을 배우려는 열기도 이미 그 한류의 물결을 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 스스로의 언어문화를 하루속히 순화해서 정갈하고 세련미 있는 언어 습관을 장려하여 언어의 품격으로 우리의 문화의 품위도 선양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풍미가 해외로 제대로 번지는 한류를 탈 수 있었으면 하는 염원을 품어 본다. (김경동, 「요지경 속 언어생활 문화의 변천」, 51쪽)
우리가 절친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소중한 존재와의 관계 또한 소중한 것임을 알았기에 그것을 손상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양보하고 상대방을 포용하는 것’이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담보하는 이 기본 원리를 우리는 어려서 친구 관계에서 터득하였고, 이것은 그 후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 귀중한 지혜가 되었다. (김명렬, 「친구」, 60쪽)
분수에 맞게 사는 것, 자성自省하면서 사는 것, 과욕을 부리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 복된 삶을 보장받는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가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 남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자기에게 지워진 한계가 곧 축복이라고 여기고 살면 그것이 곧 행복의 걸음길이 된다. (김재은, 「한계 인식」, 79쪽)
곧 군자라면 자기가 일할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추구하면서 또 자기가 추구하는 뜻을 즐기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그 일이 이루어졌을 적에는 그 이루어진 일을 유지하거나 처리하는 일을 즐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물론 우리는 먼저 우리가 할 일을 잘 선택해야 할 것이다. 공자는 일이 이루어진 뒤의 일까지도 가르치고 있지마는, 먼저 우리는 적어도 일을 하는 몸가짐만은 잘 배워야 할 것이다. (김학주, 「일을 하면서」, 95쪽)
‘이상주의자 쉴러의 시선은 약간 하늘을 향해 있고, 현명한 현실주의자 괴테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구나! 바로 그대들 두 시인이 합심해서, 균형과 조화를 이상으로 하고 인문적 사랑을 시원한 분수처럼 내뿜는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완성해 낸 것이다!’ 나는 두 시인을 향해, 관광객들이 보거나 말거나 온 마음을 다해 합장했다. (안삼환, 「바이마르 산책」, 120~121쪽)
해마다 여러 종의 새 꽃을 처음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같은 시기에 같은 곳을 다시 찾아다니며 늘 보던 꽃들을 보고 또 보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지루해하거나 지치는 일이 없다고 할까요. 한편 내가 그러고 다니는 사이에 들꽃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애착을 넘어 편집偏執이 되고 순박한 탐화探花가 볼썽사나운 탐화貪花로 타락하지 않았을까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꽃 찾아다니기 와 꽃 사진 찍기가 상승작용을 했을 거라는 점입니다. (이상옥, 「들꽃 찾아 반백 년」, 154~155쪽)
늙은 천재는 차분한 지성으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 것이 서울 88올림픽의 굴렁쇠 소년 이미지로, 혹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합성의 ‘디지로그’ 발상 같은 미래 제시, 비전의 제시다. 그런 의미에서 80대의 암 환자인 늙은 천재도 병약한 10대의 천재와 다를 바 없이 예지豫知 능력에서 타고난 높은 수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일, 「늙은 천재」, 163쪽)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나는 어린 시절에서 왔다. 사람들이 어느 고장의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 출신이다”라고 했단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은 곧 고향이요, 고향은 곧 어린 시절이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곧 어린 시절을 그리는 마음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절, 생각만으로도 전율처럼 번지는 그 애틋함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익섭, 「고향」, 193쪽)
아아, 이제는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마주 앉아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던 대학생 시절의 어릴 적 제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이제 다시는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선생님을 뵐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세월이 가만히 있지 않았음을 어찌 실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기야 이제 저도 정년퇴임을 할 만큼 나이가 들었으니, 세월의 부지런함을 어찌 절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장경렬, 「“어찌 세월이 가만있었겠는가”」, 223쪽)
상상력, 이미지, 스토리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 케케묵은 신화와 인문학 고전에 그 원형이 담겨 있고 그것이 시대에 따라 끝없이 변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독서를 통해 그 원형을 장악하면 앞으로 도래할 변혁의 시대에 필요한 능력을 쉽사리 얻게 될 것이다.
(정재서, 「문자의 근원적 힘을 전유하라!」, 274~275쪽)
몸짓과는 말할 것도 없지만 몸의 쇠락이 상상이나 기억이나 언어에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새삼 묻고 싶어졌습니다. 저에게서 무엇이 소진해가고 있는 걸까 하는 물음을 묻고 싶은 거죠. 몸을 추슬러 겨우 감행한 버킷 리스트의 실천에서 제가 얻은 것은 어쩌면 점점 굴신이 불편해지는 무거워지는 상상, 점점 선택적이게 되는 얄팍한 기억, 그런 것을 언어에 담는 것조차 점점 무의미해지는 게으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진홍, 「버킷 리스트」,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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