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사상 미디어서평

[연합뉴스] 재미동포 한혜영 새 시집…인간의 존재론 탐색(2013-06-12)

푸른사상 2013. 6. 12. 19:10



동화작가의 3번째 시집 '올랜도 간다' 출간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목숨 있는 것들은/ 발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상승 기류를 계속해서 탈 수가 없다/ 가벼운 깃털을 가지고도/ 우주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새들/ 전깃줄로 되돌아와 쓸쓸하게/ 까딱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발의 무게 때문이다/ 발만 없었더라면 태평양 상공/ 어디쯤에서 멋지게 실종될 수도 있었을/ 나도 발 때문에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다/ 나무도 한때는 새였다는 소문이 있다/ 지상으로 끌려내려 올 때의/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의 발에다 못질을 하고서야/ 한 자리 붙박일 수 있었다는"(시 '무거운 발' 전문)

'팽이꽃', '뉴욕으로 가는 기차' 등 장편동화로 국내에 알려진 재미동포 한혜영(여·59) 씨의 세 번째 시집 '올랜도 간다'는 이민의 애환과 함께 인간의 존재론을 탐색한다.

'발'이라는 은유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삶을 들여다보고, 인간이란 지상에 발자국을 남기는 존재이며 그것을 통해 삶의 질을 깨닫는다고 갈파한다.

"수심보다 더 깊은/ 한숨의 계단을 밟아서 내려가 보면/ 저렇듯이 걷어간 발자국들만 부려놓은/ 거대한 무덤이/ 수수만 개라는 설이 있다/ 코무덤이나/ 귀무덤보다 할 말이 많은 발자국들이/ 저를 버려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주인의 발목을 기다리며/ 하품 꺽꺽하고 있다"(시 '발자국 무덤에 관한 설' 중에서)

올해로 23년째 이민 생활을 하는 작가에게 언어는 여전한 걸림돌이다. 소통의 도구가 말이라고 볼 때 불편을 넘어 절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총보다 무서운 혀를 장착하고/ 세계 곳곳을 점령했던 영어는 강적을 만난 것이다/ 알카에다보다 지독한/ 내 모국어의 성벽을 뚫을 수가 없다/ 스무 해가 넘는 동안 영어는/ 철옹성 같은 동굴 입구나 약간 괴롭혔을 뿐"(시 '오래된 고집' 중에서)이라며 영어는 그에게 극복이 아니라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라고 털어놓는다.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숲이 되고 강이 되어'에 이어 내놓은 이번 시집에서는 현지 문화의 적응이라든지 고국에 대한 향수, 상충하면서 조금씩 동화돼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치 못할 감정의 소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내 시는/ 두려움 속에서의 비명, 아니면/ 불안함을 잊어보려는 노래"라고 '시인의 말'에서 고백한 한씨의 시에는 이민자들의 공통분모인 '고향', '추억', '향수' 등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대구탕, 순두부 한 그릇 만나러 고향집 간다/ 시간 반도 넘게 운전을 해서 올랜도 간다/ 고맙다고, 고맙다고 대구탕 순두부가 고맙다고/ 같이 밥 먹어줘서 고맙다고/ 벌건 얼굴로 꾸벅꾸벅 맞절하러 올랜도 간다/ 이것이 생이지 펄펄 끓는/ 뚝배기에 숟가락 담가 보려고 올랜도 간다/ 비라도 내리는 날은/ 좀 더 멀리까지 나가보고 싶지만/ 그것이 눈발이라면/ 영영 달아나 돌아오지 않을 수 있을 테지만/ 플로리다서 눈발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 때문에/ 귀갓길 아직 지우지 못하는/ 우리는 생리를 치르듯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올랜도 갔다가 집으로 온다"(시 '올랜도 간다' 전문)

1990년 미국 플로리다주에 이민한 그는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고, 1997년 미주 '추강 해외문학상' 신인상, 계몽문학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