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택 미술에세이, <오후 네 시의 갤러리>
분류-- 예술
오후 네 시의 갤러리
서종택 지음|153×200×11mm|184쪽
22,000원|ISBN 979-11-308-2212-9 03600 | 2025.2.3
■ 도서 소개
갤러리를 산책하며 만난 우리 그림에 대한 인문적 단상
서종택 작가(고려대 문화창의학부 명예교수)의 미술에세이 『오후 네 시의 갤러리』가 푸른사상에서 출간되었다. 관람객이 더 들지 않을 것 같은 오후 네 시의 한산한 갤러리, 저자는 상념과 몽상의 시간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예술 텍스트가 개성과 심미성을 넘어 한 시대의 담론임을 보여준다.
■ 저자 소개
서종택
작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저서로 『외출』 『백치의 여름』 『원무』 『한국 근대소설과 사회갈등』 『한국 현대소설사론』 『바람의 화가 변시지』 『갈등의 힘』 『코리아 블루』 등이 있다.
■ 목차
작가의 말
제1관
김종영_ 근대의 에스키스
임만혁_ 삶의 적막과 우울
윤길중_ 상처의 옹호
윤길중_ 슬픈 오브제들
김은영_ 피임사회의 욕망
손상기_ 공작도시의 삶과 우수
임옥상_ 불온하게 아름다운
이왈종_ 일상의 만화경
강요배_ 역사가 된 자연
권순철_ 얼굴의 사회사
박은용_ 남도화의 전통과 창조
변시지_ 바람의 역사
제2관
장욱진_ 탈속의 새
박노련_ 침묵의 풍경
박노련_ 지중해의 바람
정종미_ 시간이 빚어낸 색
백순실_ 차와 이미지
민병헌_ 모호한 세계의 이미저리
김원숙_ 맨해튼의 초승달
김호득_ 마음의 흐름
문인 초상화전_ 기질의 문단사
오수환_ 마음의 추상
송수남_ 추상의 수묵
한명섭_ 장르와 매체의 자유
■ ‘작가의 말’ 중에서
오후 네 시의 갤러리는 한산하다. 작가는 이미 다녀갔으며 개막에 초대된 이들 또한 전시장을 둘러보고 모두 돌아간 뒤다. 몇 개의 화분들이 입구 쪽에 도열해 있고 데스크에는 누군가가 홀로 앉아 있다. 문을 닫기에는 이르고 관람객은 더 들지 않을 것 같은 시간, 오후 네 시의 갤러리에는 그래서 늘 늦은 관람객의 평화와 자유가 있다.
길을 걷다가 문득, 혹은 근처에 일을 마치고 허전하고 섭섭하여 발길을 돌려본 그곳, 은밀하게 스며든 그 공간에는 이미 내가 꿈꾸어 온 것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하고 싶었던 그림이 문학으로 바뀌었고 작업실보다는 강의실에서 보낸 나의 이력은 모두 미완의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이 에세이들은 발길 따라 눈길 따라 기웃거려본 갤러리에서의 상념과 몽상의 시간들을 담은 것이다. 시대와 이념에 무관하게 토로되어 있지만, 그림에 대한 나의 그리움과 허기의 흔적들이다.
■ 출판사 리뷰
오랫동안 소설의 창작과 이론을 함께 해오던 저자가 그림에 빠져 있던 내밀한 시간을 『오후 네 시의 갤러리』에 담았다. 작가평전 『바람의 화가 변시지』를 펴낸 이후의 첫 에세이집이다. 미술 이론과 이념과는 별개로 발길 따라 눈길 따라 기웃거려본 갤러리 산책에서의 우리 그림에 대한 단상들을 한 권에 모았다.
이 인문학자의 미술작품들에 대한 관람의 태도에는 단순한 심미적 관점을 넘어 사회와 역사의 맥락에서 조망하려는 비평적 접근이 엿보인다. 예술과 사회에 대한 상호성과 독자성을 아우르는 저자의 글들은 예술 텍스트가 단순한 개별 작품이 아니라 시대적 담론의 일부임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장욱진, 김종영, 변시지, 송수남, 이왈종에서부터 오수환, 강요배, 임옥상, 손상기, 임만혁에 이르기까지, 20여 국내 작가의 갤러리 순례기가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관람객이 더 들지 않을 것 같은 오후 네 시의 한산한 갤러리를 산책하듯, 저자는 상념과 몽상의 시간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아름다운 그림을 만나고 생각을 가꾼 순간들을 접하면서, 우리를 붙잡는 예술의 매력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 책 속으로
이 타버린 붉은 구두 한 짝은 거칠게 마모되어 배열된 검은 부장물의 색조와 잘 대비되어 있다. 프린트와 리프린트가 교직된 바탕 위에 놓인 적과 흑의 외짝 신발은 그 검은색의 절망과 진홍빛 정념이 극명히 대비되면서 상황의 비극성을 고조시켜준다. 작가는 타버린 구두 주인의 행방이나 그와 함께 그 구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상상의 공간까지도 넉넉히 마련해주고 있다.
훼손 왜곡된 형과 색은 자연스럽게 그 이전의 피사체의 꿈의 형상들을 기억하게 해준다. 인간과 사물들의 장애나 상흔들에 대한 옹호는 결국 드러난 형국보다는 기억해야 할 가치들에 대한 희구일 것이다.
그의 사진들은 바라보기보다는 읽어내기에 좋은 것들이며 아파하다가 마침내 동행하게 되는 치유의 풍경들이다. 그가 찍은 것은 일그러진 사물이 아니라 본래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욕망이다. (37~39쪽)
얼핏 잘 구워진 빵의 둘레 같기도 하고 도넛의 잔해 같기도 한 황갈색의 테두리―이 거대한 콘돔 속은 그러나 이 음험한 공간에 찾아든 자들의 욕망과 좌절, 성스러움과 비속함, 은폐와 권태가 함께 어우러진 육체적이며 은유적인 공간이다. 자잘한 빛을 제거해버린 채 테두리 자체와 그 내부를 극사실로 보여주고 있는 이 장면은 어김없이 현대인의 욕망의 굴레를 드러내주며 그 욕망 안을 기웃거리다 마침내 함몰되어버리는 존재의 덫이라 할 수 있다. 원형의 침대와 거대한 캡슐이 거느리고 있는 어둠의 동공은 요람이나 무덤, 생성과 소멸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실낱처럼, 거미줄처럼, 잘려 나간 순대처럼 뒤엉킨 내부의 공동은 그 디테일한 묘사에 의해 섹스의 본질과 절망을 잘 확대해 보여준다. 심연처럼 아득한 어두운 공간은 죽음의 이미지와 관련된다. 그리하여 조르주 바타유의 이른바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서의 에로티즘의 저돌적 모습이 끔찍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43쪽)
그리하여 그가 그리는 자연은 해석된 풍경, 혹은 자신을 투영한 것들이다. 그는 대상을 묘사하기보다는 그것과의 관계를 그린다. 그 형상이나 흐름이나 치솟음, 뒤섞임이나 표면들은 산이나 물비늘, 파도, 개펄을 빙자해서 임의의 혹은 자의적 형태로 자신의 심상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과 구름과 산의 구멍은 어스름에 차 있고 빗물은 비애처럼 흐른다. 검은 하늘과 누런 구름은 대지의 질서 혹은 한생의 장엄한 일몰을 상기시켜준다. 나무들은 숲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고 고목은 음산하다. 그의 풍경에 가라앉아있는 시간의 더께 혹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관람자를 유추적 상상 속으로 이끈다. 그리하여 북촌의 팽나무나 한림의 까마귀들이 보여준 기억의 고유명사들은 하나의 보통명사로 전이된다. 그의 자연에 대한 해석적 근거를 제주의 풍토나 역사와 조응해보는 관점은 이제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은유는 세계를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 울림이 상징에 이르면 해석자를 당혹에서 수긍으로 이끌면서 경이에 눈뜨게 한다. 최근의 <꽃비>나 <초록>이 보여준 심미적 효과는 구성의 단순성에서가 아니라 해석의 다의성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 자연이 역사가 되는 그의 모색은 의미 깊다. (65~68쪽)
그의 화면에 번지는 마치 안갯속 같은 화면 구성은 그가 즐겨 쓰는 심미적 장치이다. 그것들은 마치 우리가 잠든 사이 집과 마당과 거리에 간밤에 몰래 진주해온 안개의 군단처럼 당혹스러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경험하게 해주는 이치이다. 그것은 안개에 휩싸였을 때, 보이지 않는 당혹감이 이내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한 즐거움으로 전이되는 과정이다. 안개 속의 사물과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되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소중한 것이 되게 하고 그것을 발견해낸 자의 기쁨을 배가시켜준다.
안개는 우리를 모호함과 무분별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르쳐준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 보아야 할 것들은 사실은 무엇인가가 그것을 가리고 있었음을,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찾아야 할 무엇이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135~137쪽)
순간적으로 그러나 무겁지 않은 경이로움으로 우리를 낯설게 하는, 그 반전의 기법은 그녀의 그림의 설화성과 함께 주요한 특성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한 작가의 재치는 아닐 것이다. 어떠한 인물이나 풍경이나 사물들의 정태적인 상태를 묘사하기보다는 그러한 정황에 이르는 계기나 진행의 순간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보이는 역동성 또한 단순한 회화적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로맨틱 아이러니(romantic irony)―현실과 꿈, 기쁨과 슬픔, 만남과 헤어짐, 희망과 상실 등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우리들의 삶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이들의 대칭적 국면을 뒤집어보거나 통찰한 자들만이 마침내 구사하곤 하는 유머와 패러독스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초월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삶에의 긍정―방 안 가득히 드리운 황혼의 그림자와도 같이 엄습해오는 짙은 페이소스의 세계이다. (145~147쪽)
작가가 제시한 점, 선, 면들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상상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기호이거나 상징일 수도 있는 두 개의 선이 지시하는 바는 관람자의 심상에 따라 달라진다. 두 개의 먹선이 무엇을 지시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어떤 수긍이나 동의로 전이되는 순간의 심미적 체험은 경이롭다. 새의 날갯짓이나 곰의 발자국이 숲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듯이 한 작가의 붓의 행방은 그의 정신의 행로와 무관할 수 없다. 화가의 붓놀림은 작가 자신의 관념이나 그 유희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양정신 혹은 문인화의 어떤 맛과 멋이기도 할 것이다. (153쪽)
그는 보이는 대로 그리지도 않으며 알고 있는 대로 그리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느끼는 대로 그린 것 같지도 않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렸다. 느끼는 대로 그린 것은 피사체가 주인이 되지만 내키는 대로 그리는 것은 관찰자가 주인이다. 이것은 화가가 세계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화가를 모사하는 형국이다. 예술의 재현적 의도가 표현적 의도로 대체되고 그것은 다시 해체된다. (170쪽)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좀 더 기하학적 무늬의 연속처럼 보이는 반복적인 먹의 농담이 계속된다. 일정한 방향으로 단조롭게 진행되는 단속적인 선획의 집적, 일정한 두께로 구획되는 칸 속에 밀집된 선획의 집적은 오랜 시간의 더께를 견디고 있는 고고학적 정서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보다 원초적인 어떤 항심(恒心)의 무늬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단조롭고 기계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붓놀림의 반복에서 우리는 또한 긋고 칠하는 행위의 무상성(無償性) 혹은 무위(無爲)의 사상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수묵은 그래서 그림이 아니고 생각이다. (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