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를 넘어서
고미송 저|153×224|신국판|240쪽|값 16,000원|
채식/ 여성/ 불교
작년 말부터 올해 초반까지 구제역 파동으로 엄청난 수의 가축들이 죽어야 했고 심지어는 생매장을 당해야만 했다.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고 이를 계기로 채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사람들도 늘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어서 그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한동안 달아올랐던 채식의 열기도 어느새 익숙한 고기 맛에 눌려버리고 말았다. 돼지 생매장의 현실은 끔찍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에 없던 새로운 사건이었을까? 진실은 그것이 우리 현실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육식동물이 날마다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듯이, 인간세상의 도살장에는 날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살생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크고 작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싸우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다른 생명체들의 고통의 바다 위에 세워진 가건물과도 같다. 그러니, 일시적인 연민이나 감성적인 자각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다. 왜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지, 원인의 원인을 살펴볼 수 없다면 우리의 대응은 자극에 대한 일종의 신경반사적 반응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동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동물을 살생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의도하고 있다. 필자의 말을 빌리자면 ‘본인이 가진 고민의 실타래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몇 개의 정거장들을 내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여성으로서 남녀불평등의 현실을 문제삼아왔던 맥락이 단순한 집단이기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평등이라는 개념의 근본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어디까지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내 양심의 테두리는 어디까지이며 그것의 근거는 무엇일까…….
특정 답에 안주하기는 쉽지만 현실은 끊임없이, 모든 정답을 가차 없이 깨주곤 한다. 정답의 편리함은 특정 종교나 사상에 고착된 이들의 안락함을 위해 봉사하지만 그것의 대가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한계에 갇힌다는 점이다.
진실은 항상 우리가 옳다고 믿는 그 무엇의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를 넘어서〉라는 제목은 채식이라는 보다 나은 삶을 선택할 필요성에 대한 강조임과 동시에, 채식주의라는 사상과 올바름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로막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불교라는 종교의 틀을 고집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불교는 채식을 하는 종교다 아니다는 모두 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세상에서 채식의 의미를 탐구하고 살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이 세상의 여타 문제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추구하는 고민의 흔적을 이 책은 담고 있다.
1부는 채식주의자의 입장에서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인식론적 자세의 안이함을 밝히고자 하는 가벼운 단상들이며, 2부는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 채식의 필요성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보다 본격적인 탐구의 글들이다. 3부는 진리를 구하는 수행자의 입장에서 살생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넘어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은 글들이다. 육식은 개인적 행위이기에 앞서 사회적인 시스템이지만,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은 다시 ‘안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아직 채식 인구가 얼마 되지도 않은 현실에서 너무 앞서나가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모든 ‘문제들’에는 유사한 딜레마와 모순과 자가당착이 잠재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주체 스스로를 돌아보는 차원에서 유의미한 내용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다시 한 번, 이 책은 정답을 구하는 시도가 아니라 정답을 구하는 주체 자신을 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스스로를 이해하게 될 때 답과 더불어 문제도 이해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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